안녕 by kanasi

디자이너와 처음 일해 본 것은 이천일 년 해비타트에서 간사로 있을 때였다. 뉴욕의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다 귀국해 해비타트에서 자원봉사를 하던 성익은 나를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디자이너도 아니면서 디자이너처럼 일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계에 부딪쳐 해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서 내가 낸 아이디어가 채택되기도 했다. 그가 밤을 새며 마우스를 클릭하는 동안 나도 그 옆에 꼼짝 않고 앉아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변화들을 지켜보았다. 밤새 작업한 내용을 새벽에 출력소에 넘기고 나서 그는 또 예의 그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내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는 건 즐거웠다. 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나와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을 때 성익은 나를 자기가 아는 디자인 회사에 소개해 주었다. 그 회사에서 만난 디자이너들도 역시 나를 신기하게 여겼다. 나는 여전히 디자이너가 아니었지만 디자이너처럼 일했고 회사를 몇 군데 옮겨 다니는 동안 그런 내 행태를 좋아해 주는 디자이너도 몇 명 만났다. 나는 윤서체와 산돌서체의 차이를 알았고 에스엠신명조와 에스엠신신명조의 차이를 알았다. 나는 헬베티카를 좋아했고 그보다 악시덴츠 그로테스크를 좀 더 좋아했다. 나는 왼쪽 정렬된 본문을 좋아했고 활판 인쇄된 책의 오돌도돌한 요철을 만지며 즐거워했다. 안그래픽스 디자인에 나타나는 자기 모방을 발견하는 데 재미를 느꼈고 디자인 잘 된 책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해 하던 디자이너들 중 한 사람이 나를 아이앤아이에 소개해 주었다. 대표는 날더러 면접을 보러 마포 어느 요정으로 오라고 했고 나는 거기서 귀엽게 생긴 직원이 황송하게도 젓가락으로 손수 집어주는 안주를 먹으며(내 평생에 여자가 먹여 주는 안주를 먹어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양주 한 병을 대표와 나눠 마셨다. 나는 술에 거하게 취해 그에게 '디자이너는 별'이라는 간지러운 대사를 날렸다. 그리고 나는 어두운 밤하늘이라고... 별이 더 밝게 빛날 수 있게 뒤에서 돕겠다고 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많이 오글거리지만 대표는 당시 그 말에 썩 기분이 좋아졌는지 양주 한 병을 차에서 더 꺼내왔다. 다음날 깨질듯한 머리를 붙잡고 사직서를 내러 간 나에게 사장은 반 협박을 했다. 이러고 네가 나가면 앞으로 좋은 꼴 못 볼 거라는 요지였다. 브랜드 업계에는 발을 못 붙이게 해 주겠다는 얘기도 했다. 웃으며 그렇게 하시라고 하고 나는 며칠 뒤 아이앤아이에 출근했다. 훌륭한 디자이너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오 년 남짓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책을 디자인할 때 얼마나 철저히 원칙을 지키고 얼마나 꼼꼼히 세부를 살펴야 하는지 그 디자이너들은 몸소 보여주었다. 단순한 디자인이 갖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해 주었고 통념을 벗어난 디자인을 향한 분투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인쇄용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클라이언트 응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업체와 작가들에게 제 때 비용을 보내 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실천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디자이너가 아님에도 그들의 후임처럼 일했고 그 별들을 위해 더 어두워지고 더 어두워졌다. 속으로 타들어가는 불은 나를 태우고 또 태워 결국 까맣게 타 없어질 때까지 나를 살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별들이 좀처럼 빛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어두워지면 저 별들이 빛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그들도 함께 빛을 잃었다. 내가 그렸던 그림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차갑게 식어간 별들 중 하나와 전화 통화를 했다. 이제는 그만둔 지 이 년이 넘어가는 아이앤아이가 마침내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는 더 이상 기울어가는 회사를 지탱할 힘이 없었다. 한 줌 남았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 강남구 논현동 13-22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회사 주소가 아니다. 일 주일 동안 집에 못 들어가고 의자에 앉아 숙식을 해결했던 기억들도, 사무실 벽과 바닥에 늘어놓은 시안들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다니며 언제 끝날 줄 모르는 마라톤 회의를 하던 기억들도, 주차장에 나와 벌벌 떨며 담배를 피우던 기억들도,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다래성으로 기어들어가던 기억들도 모두 바람에 먼지가 흩어지는 것처럼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심상과 상상(Image & Imagination)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한 소박한 성품의 사람들, 그래도 실력만큼은 최고였던 디자이너들의 얼굴이 밤하늘의 별처럼 깜박거리며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 생에서 가장 굴곡 심했던 시간. 그 시간을 보냈던 곳. 미련도 후회도 별로 남지 않았지만 갑자기 소식을 듣고 나니 황망함을 감추기 힘들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홀연히 사라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상실들을 미리 걱정해야 할 것 같은 밤이다.

거미 고형렬 by kanasi


[복붙] 성공 by kanasi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곡은 어느 장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불멸의 이순신'에서 들은 곡이었다. 그땐 무슨 곡인지 잘 몰랐지만 그 장면에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선곡표에서, 이름은 들어 봤지만 작품은 전혀 모르는 그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하고 역시 음악의 세계는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1824년이면 베토벤이 9번 교향곡을 처음 선보인 해.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대부터 교사였고 장남인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우며 보조 교사로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될까 싶어 동네 술집에서 연주 알바를 했는데 직업병처럼 알콜 중독에 걸리고 아들이 열세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입이라도 하나 덜자는 생각에 그를 수도원 부속 학교에 보냈고 그는 그곳에서 음악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며 오르간 연주 경험을 쌓았다.


교원 자격을 따고 열일곱 살에 처음 발령받은 학교. 교장은 그를 몹시 갈구며 잡일만 잔뜩 시켰다 자기 개인 소유 밭 김매기 따위.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견뎠지만 음악을 할 시간조차 낼 수 없는 것만큼은 참기 어려웠다. 교장은 자기 멋대로 그를 부려 먹으면서도 그의 근무 태도에 불만을 표했고 결국 이 년만에 그는 장학사로부터 징계를 받아 오지 학교로 전출당했다. 그 오지 학교에서 그는 비로소 자유로이 음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갈고 다듬은 때가 그때였다고 한다. 사실 그 장학사, 그를 받아 주었던 수도원 부속 학교의 원장이었다.


안톤 브루크너


이런 마음 따뜻한 일화로 시작한 그의 젊은 시절이지만 그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마흔이 될 때까지 작곡 공부에 힘쓰며 꾸준히 작품을 썼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물론 지금은 그의 작품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그의 스타일이 잘 먹히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첫 작품은 '불멸의 이순신'에 나왔던 바로 그 음악, 교향곡 7번이었고 그 곡을 초연한 것이 1884년 그가 환갑 되던 해였다. 오랜 유망주 시절을 지나 비로소 스타가 되고 나니 이미 노년.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 변변한 연애도 못해보고 독신으로 살았다. 일흔 두 살까지 사셨으니 꽤 장수하신 편이지만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의 그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좀 더 일찍 누렸다면 훨씬 더 열정적으로 자신감 있게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래도 짧게나마 생전에 인기를 누렸다는 게 위안이긴 하다. 그처럼 일로매진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다. 예순 살에 성공해도 성공은 성공 아닌가. 모차르트도 있고 슈베르트도 있고 말러도 있지만 오스트리아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으니 그건 브루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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